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롱소드 검술 (문단 편집) === 교양과목 및 스포츠화 === 16세기가 되자 인구가 밀집된 도시가 늘어나면서 좁은 도심에서는 롱소드같은 큰 무기를 호신용으로 사용하기 힘들어졌고[* 어느 정도였냐면 현대 한국의 다세대주택 사이의 좁은 골목이 당시에는 평범한 수준의 길이었다. 이런 곳에서 1.2m가 넘어가는 롱소드를 자유롭게 휘두를 수는 없었다.][* 미드 [[왕좌의 게임]]의 킹스랜딩이나 에소스의 미린의 모습을 생각하면 한층 이해하기가 쉽다.] , 또 전쟁터에서는 총기가 슬슬 흔해져 기사가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구도가 뒤집혔다. 그래서 [[파이크]]와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방진을 형성하여 싸우는 일이 많아져 롱소드를 휘두를 일이 줄어들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에 따라 더 작고 가벼운 사이드 소드가 주력 도검이 되고 인기를 얻으면서 롱소드는 찬밥신세가 된다. 길이만큼은 롱소드에 필적한 레이피어는 아예 찌르기에 주력했으며, 검술 계통이 선대와 달라졌다. 본산인 독일에서도 처지는 비슷했으나 그래도 워낙 롱소드 전통이 확고해서 실전검술로는 배우지 않더라도 <모든 무기술의 기본>으로써 반드시 롱소드를 교육시켰다. 현대 MMA 선수라면 누구나 복싱, 레슬링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게와 길이가 적당하고 기술이 복잡한 무기이므로 (리히테나워) 롱소드로 무술 실력을 키우고, 실전에서는 아예 커다란 [[츠바이핸더]]나 비교적 작은 [[카츠발거]], 메서 같은 걸 휘두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찌르기를 금지하는 등 실전검술이 아닌 도장검술로써 안전에 보다 치중하는 변화를 보이게 된다. 17세기에 들어서면 독일에서조차 롱소드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다만 18세기에도 독일의 검술학교를 묘사한 판화에서는 롱소드 검술과 [[메서]]가 스포츠화된 종목인 두삭(Dussack)이 보인다. 물론 그 그림에서도 몇몇을 제외하면 절대다수가 [[스몰소드]]와 같은 근대 검술을 훈련하고 있으며, 롱소드는 17세기 말에는 완전히 스포츠화되어 날이 아닌 평면으로 때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16세기의 [[주스팅]] 토너먼트 대회에서도 롱소드 검술 대회가 열렸으며, 여기에서는 방어구를 착용하고 승부를 겨루는 방식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특유의 룰이 존재하여 실제 검술이 활약하기는 힘들었다. 손과 하체 타격은 금지, 상체와 머리만 타격할 수 있으며 찌르기는 금지되었고 칼날로 쳐서도 안되고 평평한 옆면으로만 때려야 했다. 가드나 퍼멀로 타격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런 안전 룰이 존재했고, 왕과 도전자 룰과 같은 게임을 흥미롭게 만들기 위한 룰도 있었다. 왕과 도전자 룰이란 챔피언이 왕이고 도전자들이 왕을 상대하는데, 왕은 기회가 2번 있어서 도전자에게 한 대 맞더라도 바로 직후에 도전자를 맞추기만 하면 왕이 이긴 것으로 간주되는 룰이었다. 이런 토너먼트만 찾아다니며 참가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검객들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검술 마스터들은 토너먼트가 인위적인 룰로 진행되는 게임이라는 이유로 토너먼트는 검술이 아니라고 했으며, 실제로 검술 길드끼리의 친선 대결에서는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고 평소 훈련하던 방식으로 진행했다. 16세기 들어 롱소드 훈련에서 찌르기는 안전 문제로 금지되었으며, 법률에 의해 연습중의 찌르기는 살인미수, 사적인 결투에서는 일종의 특수폭행으로 처벌받았다. 반대로 레이피어나 사이드소드, 봉으로는 찔렀다고 문제삼지는 않았다. 검술 도장을 가진 검객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광장이나 적당한 빈터, 혹은 야외에서 지도가 이루어졌다. 당시에도 도장 검술(Schulfechten)과 실전 검술(Ernstfechten)의 차이와 인식이 있었다. 슐펙텐은 영어로 스쿨 파이팅에 대응되는 단어이며, 검술학교에서 유술기를 비롯한 여러 기술을 다칠 정도로 거는 것이나 찌르기, 강한 타격을 금지하여 다양한 룰을 이용하여 안전을 우선시하여 수련하는 것을 말한다. 에른스트펙텐에서 Ernst는 실전에서의 진지함을 뜻하는 단어[* Ernest, Honest]로, 말 그대로 모든 것이 허용된 살인 실전을 의미했다. 이러한 인식이 등장한 것은 안전상의 이유로 검술학교에서는 진검이나 진검 타입의 블런트를 사용하지 않고 [[피더슈비어트]] 만을 활용하여 연습하고 다양한 안전 규정이 있었던 탓에 실전과는 어느정도 괴리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15세기에는 찌르기까지 포함해서 연습하였기에 그래도 실전 검술에 더욱 가까웠지만 16세기에는 찌르기를 일체 금지하고 봉인함으로써 일부 기술들의 변질이 이루어졌으며[* Kurtzhau라는 기법이 그러하다. 15세기의 안드레 파렌하잇 매뉴얼에서는 상대 검 아래쪽으로 돌려서 바이코니오로 끝나는 찌르기이지만, 16세기 후반의 요아힘 마이어 매뉴얼에서는 다 똑같으면서도 찌르기가 아니라 더 높이 칼끝을 들어서 상대의 검을 가드로 받아내면서 베기로 끝낸다.] 이로 인해 양자의 인식의 간격이 더 벌어진 감이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유행한 다르디 학파에서도, 비록 사이드소드 검술이기는 하되 도장에서는 손을 때리지 않고 몸만 때리며, 모든 자세와 기술을 다 써서 연습하지만 시합이나 실전에서는 손부터 먼저 때리고, 오른발만 앞에 내민 상태에서 싸우는 경향이 컸다고 하며 이에 따라 다르디 학파의 마스터들도 이 두가지를 분류해서 설명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